목차
2025년 10월 15일,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내린 구윤철 부총리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한미 무역협상이 막판 고비를 맞은 시점이었다. 3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대미 투자를 놓고 양국이 수개월째 줄다리기를 벌여왔다.
미국은 현금 직접 투자를 원했고, 한국은 외환시장 충격을 우려했다. 이 갈등의 해법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통화스와프다.
구 부총리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미국이 우리가 제안한 통화스와프 방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밝혔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도 같은 날 "향후 10일 이내에 일정한 진전이 있을 것"이라며 협상 타결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외화보유액의 84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면서도 환율 급등과 외환위기를 막아야 하는 이중 과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과연 통화스와프가 될 수 있을까. 10월 31일부터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미 양국은 마지막 협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미 관세 협상, 통화 스와프로 돌파구 찾나의 핵심 쟁점을 현장의 목소리와 함께 들여다본다.

500조 원이 걸린 협상의 분수령
10월 15일과 16일, 워싱턴은 한국 경제 수장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구윤철 부총리에 이어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까지 동시에 미국을 찾았다. 이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지난 7월 말 큰 틀에서 합의했던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당시 한미 양국은 미국이 한국에 예고한 상호관세를 25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낮추는 대신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디테일이었다.
1. 협상이 교착된 진짜 이유
미국은 투자 패키지의 현금 집행과 투자처 선정 권한, 그리고 수익의 90퍼센트를 요구했다. 사실상 백지수표를 요구한 셈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외화보유액 4163억 달러의 84퍼센트에 달하는 3500억 달러를 한꺼번에 내놓으면 외환시장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김용범 정책실장과 김정관 장관의 이번 방미 목적은 3500억 달러 투자 패키지가 한국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는 방안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협상단의 최대 목표는 통화스와프 체결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2. 베선트 장관의 이례적 발언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의 발언은 협상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는 15일 워싱턴 재무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과의 이견이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향후 10일 이내에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라고 밝혔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통화스와프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다. "재무부가 통화스와프를 제공하지는 않으며, 그건 연방준비제도 소관"이라면서도 "내가 연준 의장이라면 한국은 이미 싱가포르처럼 통화스와프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통화스와프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3. APEC 정상회의가 데드라인
양국이 서두르는 이유는 명확하다.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가 사실상 협상의 데드라인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29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방한할 예정이다. 이 기간에 한미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크고, 무역협상 결과를 발표하기에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다.
증권가에서도 APEC 정상회의를 환율 변동의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KB증권 오재영 연구원은 "APEC 정상회의에서 미중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관세 협상 합의점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화스와프, 해법인가 미봉책인가
1. 원화 기반 투자 펀드 방식
정부가 미국 측과 논의 중인 방안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원화를 기반으로 한 대미 투자 펀드 방식이다.
이는 양국 중앙은행이 아닌 한국 정부와 미국 재무부가 직접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고 미국이 원화를 매입하는 방식이다. 미국은 과거 아르헨티나와 이런 형태로 약 2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바 있다.
하지만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장상식 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미 재무부와 맺는 통화스와프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일부 제공하는 것이어서 전체 펀드 규모를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2. 외평채 발행이라는 카드
정부는 달러 표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 즉 외평채 발행을 통한 조달 방식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국가 부채를 늘려 대미 투자 재원을 마련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의 공적 기관이 보증을 서고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도 거론되지만, 이는 금융시장에서 발행되는 채권이기 때문에 투자자에게 반드시 상환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기재부 관계자는 "통화스와프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확정된 사항은 없다"라며 말을 아꼈다.
3. 전문가들의 냉정한 시각
전문가들은 무제한 통화스와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체결될 경우 한국 경제가 무너지면 미국 경제도 악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위험이 생긴다"며 "미국에 한국은 그 정도의 국가는 아닌 것이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도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라는 것은 상호관세율을 15퍼센트로 인하하고 자동차 품목 관세를 인하하기 위해 양보한 카드지, 상설 통화스와프를 얻기 위해 양보한 카드가 아니다"며 "미국에서 해줄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4. 일본과는 다르다는 논리
정부는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일본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일본과 미국은 외환 거래에서 무제한 스와프가 가능하고 우리의 통화는 일본 엔화에 비해 기축성 성격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본과 우리를 같이 볼 수 없다고 설득하는 중"이라며 "미 국무장관이나 재무장관은 이해하는데 상무장관이 잘 이해를 못 하고 있어 계속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베선트 장관이 싱가포르를 거론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싱가포르는 6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다.
협상 타결의 열쇠는 어디에 있나
1. 투자 기간 연장과 포트폴리오 다변화
한미 양국은 직접 투자, 대출, 보증 등을 포함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운용 방식과 수익 배분 방안에 대한 이견도 조율하고 있다. 정부는 모든 사업을 한꺼번에 추진할 수 없는 만큼 투자 기간을 최대 10년까지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이 사실상 자국 시장 진입을 위한 입장료 명목으로 투자를 요구하는 측면이 있는 만큼, 이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기보다 투자 포트폴리오 구성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2. 외환시장 안정이 관건
한국은행도 한미 협상 과정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시장에서는 외환보유고 4000억 달러를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긴다. 한은 관계자는 "얼마 알라면 위험하다는 객관적인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아직 대미 투자 방식이 정해진 게 없는 만큼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외환보유고에서 투자금이 나가면 환율이 크게 올라가는데, 그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도 관세를 부여한 효과가 사라진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며 "그에 따라 외환시장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도를 두고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 등의 방안도 고민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3.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
협상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한 행보다. 그는 15일 백악관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3500억 달러를 선불로 지급하기로 합의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미국과 무역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트럼프가 언급한 선불의 의미는 3500억 달러를 확보했다는 정치적 수사로 보인다"면서 "총액 자체가 머릿속에 박혀 있고, 세일즈 됐기 때문에 줄이기는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은 "주요 쟁점의 이견을 좁혀 나가는 과정에 있다"며 "국익 최우선 원칙에 따라 미 측과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4. 경주 APEC, 마지막 기회
모든 시선은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로 향하고 있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이후 2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신정부 출범 후 첫 다자 정상회의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방한한다면 한반도에서 역사적인 순간이 연출될 수 있다. 한미 무역협상 타결은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가 될 전망이다.
구윤철 부총리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미국이 우리나라 외환시장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으니, 아마 우리가 제안한 것에 대해 받아들일 것 같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과연 한미 관세 협상, 통화 스와프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