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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5일, 한국금거래소의 모니터에는 믿기 힘든 숫자가 떠올랐다. 금 현물 가격이 온스당 4190.9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지난해 3월 2000달러 수준이었던 금값이 불과 18개월 만에 두 배 이상 뛰어올랐다. 올해 들어서만 65퍼센트, 10월에만 12퍼센트 급등했다. 같은 기간 뉴욕증시 S&P500 지수는 10.5퍼센트 상승에 그쳤다. 주식시장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값도 함께 치솟는 것은 과거 경기 침체나 증시 급락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금값 랠리를 단순한 안전자산 선호를 넘어선 달러 패권 약화의 경고음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달러지수는 올해 1월 109.96에서 10월 17일 98.03으로 10.8퍼센트 이상 급락했다.
투자자들은 미국 증시와 스테이블코인에 투자하면서도 달러 가치 하락에 대비해 금을 사들이는 양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소시에테제네랄은 2026년 말 금값 목표치를 온스당 5000달러로 상향했다.
과연 연일 치솟는 금값, 달러가 안전자산에서 밀려나는 것의 진실은 무엇인지 현장의 목소리와 데이터를 통해 분석한다.

금거래소 딜러들의 당혹감, 이번엔 다르다
서울 종로구 한국금거래소의 한 딜러는 10월 15일 오전 출근하자마자 모니터 앞에서 멈춰 섰다. 금 현물 가격이 온스당 4190.9달러를 찍고 있었다. 그는 금융업계에서 20년을 일했지만 이런 상승세는 처음이라고 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도 금값이 올랐지만 그때는 주식이 폭락하고 경제 전체가 패닉 상태였어요.
지금은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데도 금값이 치솟고 있습니다. 이건 완전히 다른 현상이에요."
1. 역사상 유례없는 동반 상승
과거 데이터를 살펴보면 그의 말이 맞다. 전통적으로 금값은 경기 침체나 증시 급락 국면에서 위험 회피 수단으로 뛰었다.
주식이 오를 때는 금이 내리고, 금이 오를 때는 주식이 내렸다. 하지만 2025년은 예외다. 금값은 지난해 3월 온스당 2000달러 수준에서 10월 중순 4190.9달러로 두 배 이상 급등했다.
같은 기간 S&P500 지수는 2024년 초 대비 23퍼센트, 올해 들어서는 10.5퍼센트 상승했다. 금값 상승률이 주식 수익률을 훨씬 웃도는 것이다. 국내 금시세는 더욱 가팔랐다. KRX금시장에서 금 1킬로그램 종목 가격은 2024년 1월 2일 그램당 8만 6940원에서 연말 12만 7850원으로 50퍼센트가량 상승했다.
2. 전문가들의 분석, 달러 신뢰 변화
김한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의 관세 정책 등)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국면에서 달러화로의 전통적인 안전자산 쏠림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달러에 대한 시장의 신뢰 변화가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더 직설적이었다. "인플레이션과 주요국 통화 가치 하락에 대한 우려로 투자자들이 실물자산으로 이동하면서 종이호랑이 같은 미국 달러화보다 금이 더 각광을 받는 시대다.
다만 자산가격 상승세가 가팔라질수록 단기 거래 세력들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진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3. 투자자들의 양면 전략
강남구에 사는 40대 직장인 박 모 씨는 올해 초부터 금 통장에 매월 100만 원씩 적립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 S&P500 ETF에도 투자하고 있다. "미국 빅테크 주식이 오르는 건 맞는데, 달러가 언제까지 강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트럼프가 관세 정책을 막 휘두르면서 달러 신뢰가 흔들리고 있잖아요. 그래서 금으로 헤지 하는 겁니다." 박 씨 같은 투자자가 적지 않다. 전 세계 투자자들이 인공지능 테마에 올라탄 미국 증시에 투자하고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소식에 환호하며 달러 자산을 늘리고 있지만, 동시에 달러 가치 하락에 대한 헤지 필요성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달러 약세의 구조적 원인
1. 달러지수 10퍼센트 급락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지수는 올해 1월 13일 109.96에서 점차 하락세를 보여 10월 17일 기준 98.03으로 10.8퍼센트 이상 급락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달러화는 지속적인 약세를 보이고 있다.
2025년 9월 기준 달러지수는 연초 대비 약 10에서 11퍼센트 하락하며 1973년 변동환율제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을 기록했다. 10년에 걸친 달러 강세 국면이 끝나고 약세 국면으로 전환되는 신호가 나타난 것이다.
2. 미국 정부 부채와 연준 독립성 흔들림
달러 약세의 근본 원인은 구조적이다. 미국 정부 부채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하 압력과 독립성 흔들림, 연방정부 폐쇄 장기화 우려까지 겹치면서 달러에 대한 신뢰는 점차 약화되고 있다. 2025년 8월 기준 미국 신규 일자리 창출은 2만 2000개로 둔화됐고 실업률은 4.3퍼센트로 상승했다.
노동시장 부진으로 인해 시장은 9월 연준 금리 인하를 예상했고 2026년까지 추가 인하 가능성도 반영했다. 관세로 인한 소비자 구매력 저하도 달러 약세 흐름을 부채질하고 있다.
3. 각국 중앙은행의 금 매입 러시
최근 금값 상승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각국 중앙은행의 금 매입이다. 세계금협회에 따르면 2024년 2분기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6퍼센트 증가한 183톤을 기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이 러시아를 상대로 시행한 강도 높은 제재는 비서방 국가 중앙은행들의 금 수요를 늘리는 배경이 됐다.
달러 비중은 여전히 높지만 글로벌 외환보유액에서 2000년 71퍼센트에서 2025년 약 58퍼센트로 감소했다. 각국이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금 보유량을 늘리는 탈달러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4. 지정학적 리스크와 무역전쟁
트럼프 행정부의 전면적인 보호무역 정책과 미중 무역전쟁의 재점화도 금값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수입품에 10퍼센트의 기본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 등 특정 국가에는 상호 관세를 추가로 적용하고 있다.
중국과 유럽연합도 보복 관세를 발표하면서 무역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금은 전쟁으로 금융거래가 막힌 상황에서 전쟁 물자를 외부에서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중동 지역의 불안정, 유럽의 경기 침체 가능성, 중국의 부동산 위기 심화 등이 맞물리며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화되고 있다.
금값은 언제까지 오를 것인가
1. 글로벌 투자은행의 5000달러 전망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금값의 고공행진이 2026년 말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소시에테제네랄은 최근 금값 목표치를 2026년 말 기준 온스당 5000달러로 상향했다.
JP모건과 골드만삭스, 시티그룹은 2025년 금값 목표가격을 온스당 3000달러로 제시했다. JP모건의 네타냐 카네바 글로벌원자재전략 수석은 "금은 여전히 헤지 자산으로서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며 "2025년 트럼프 행정부 출범 초기 거시경제 환경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높아진 점"을 근거로 들었다.
2. 지속적인 상승 흐름
이민혁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금값의 향방은 미국 실질금리의 추세적 방향과 달러의 신뢰 회복 여부에 좌우된다.
미국 인플레이션 속 연준 금리 인하로 실질금리가 하락하거나 달러의 안전자산 지위가 약화할 경우 골드러시가 단기 흐름에 그치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값은 통상 인플레이션 기대가 높아지거나 금리가 낮아질 때 상승하는 경향이 있는데 2026년에 이런 시나리오가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3. 변동성 확대 우려
하지만 모든 전망이 장밋빛인 것은 아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가 지적했듯이 자산가격 상승세가 가팔라질수록 단기 거래 세력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진다.
RSI 지표는 이미 과매수 영역에 있어 하락 조정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국 경제 지표 호조 및 달러 반등, ETF 자금 유출 및 차익 실현 매물 증가, 기술적 과열 조정, 중앙은행 매입 둔화 등이 금값 하락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속도가 둔화하고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등 악재 요인도 뚜렷하다.
4. 투자자들의 선택
결국 투자자들은 변동성에 대비하면서도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야 한다. 금 투자 방법도 다양해졌다. 금괴를 실물로 사지 않아도 금 통장 가입, KRX 금시장을 통한 거래, 금 가격 움직임에 투자하는 국내외 상장지수펀드를 통한 투자 등 간접투자로 금값 상승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은이나 플래티넘 등 다른 귀금속과 비교해 금에 대한 산업적 수요가 거의 없는 점도 금값에는 긍정적인 요인이다. JP모건 전략가는 "금은 다른 원자재들과 달리 산업 측면의 부담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무역갈등 충격으로 가격이 내려갈 위험이 적다"라고 평가했다.
"연일 치솟는 금값, 달러가 안전자산에서 밀려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여전하지만 지난 20년 중 어느 때보다 큰 압박을 받고 있으며, 금은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